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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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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사건이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요충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수차례 침략을 받았지만 함락된 적은 없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1453년 5월 29일 총공격을 감행하여 도시를 점령했다. 이 사건으로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르네상스, 대항해 시대, 종교 개혁 등 세계사적 변동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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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1405년에 태어나 1449년 황제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 속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며 동로마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명칭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다른 명칭Άλωση της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ς (알로시 티스 콘스탄티누폴리스, 그리스어)
Konstantinopolis'in Düşüşü (콘스탄티노폴리스인 뒤쉴뤼, 튀르키예어)
İstanbul'un Fethi (이스탄불운 페트히, 튀르키예어)
전투 정보
시기1453년 4월 6일 – 5월 29일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동로마 제국 (현재의 이스탄불, 튀르키예)
결과오스만 제국의 승리, 동로마 제국 멸망
영토 변화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이 정복
모레아, 트라페주스, 테오도로, 에피로스는 1460년, 1461년, 1475년, 1479년까지 동로마의 잔존 국가로 존속함
교전 세력
교전국 1오스만 제국
[[파일:Coat of arms of the Serbian Despotate.svg|20px|border]] 세르비아 공국
교전국 2[[파일:Byzantine imperial flag, 14th century.svg|25px|border]] 동로마 제국
[[파일:Flag of Genoa.svg|25px|border]] 제노바 용병
[[파일:Flag of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svg|25px|border]] 베네치아 지원병
[[파일:Flag of Papal States.svg|25px|border]] 교황령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Sicily (1282-1735).svg|25px|border]] 시칠리아 왕국
[[파일:Royal Banner of Aragón.svg|23px|border]] 아라곤 왕관령 (카탈루냐 수행원)
오르한 첼레비 충성파
지휘관 및 지도자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
할릴 파샤
자간 파샤
쉴레이만 발토글루
카라카 파샤
함자 베이
마흐무드 파샤
동로마 제국 및 연합군[[파일:Byzantine imperial flag, 14th century.svg|25px|border]] 콘스탄티누스 11세
[[파일:Byzantine imperial flag, 14th century.svg|25px|border]] 루카스 노타라스
[[파일:Byzantine imperial flag, 14th century.svg|25px|border]] 테오필로스 팔라이올로고스
[[파일:Byzantine imperial flag, 14th century.svg|25px|border]]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제노스
[[파일:Flag of Genoa.svg|25px|border]]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파일:Flag of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svg|25px|border]]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
[[파일:Flag of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svg|25px|border]] 알비소 디에도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Sicily (1282-1735).svg|25px|border]] 가브리엘레 오르시니 델 발초
[[파일:Flag of Papal States.svg|25px|border]] 추기경 이시도르
오르한 첼레비
병력 규모
오스만 제국지상군:
서방 자료: 100,000–130,000명 (일부 동시대 서방 자료에서는 과장된 수치인 160,000 ~ 300,000명 제시)
튀르키예 자료: 40,000–50,000명
현대 자료: 60,000–80,000명
다양한 대포 및 봄바드
해군:
31척의 갤리선
95척의 대형 노 젓는 배
동로마 제국 및 연합군지상군:
[[파일:Byzantine imperial flag, 14th century.svg|25px|border]] 7,000–10,000명의 정규군
30,000–35,000명의 무장 민간인
600명의 오르한 첼레비 충성파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Sicily (1282-1735).svg|25px|border]] 200명의 궁수
[[파일:Flag of Papal States.svg|25px|border]] 200명의 궁수
[[파일:Royal Banner of Aragón.svg|23px|border]] 200명의 카탈루냐 수행원
해군:
26척
[[파일:Byzantine imperial flag, 14th century.svg|25px|border]] 10척의 비잔티움 함선
[[파일:Flag of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svg|25px|border]] 8척의 베네치아 함선
[[파일:Flag of Genoa.svg|25px|border]] 5척의 제노바 함선
[[파일:Royal Banner of Aragón.svg|23px|border]] 1척의 아라곤 함선
[[파일:Flag of the Republic of Ancona (c. 1177-1532).svg|25px|border]] 1척의 안코나 함선
[[파일:Drapeau de Provence « ancien ».svg|25px|border]] 1척의 프로방스 함선
피해 규모
오스만 제국첫날: 200–18,000명
심각한 피해: 15,000–50,000명 (논쟁 중)
동로마 제국 및 연합군전사자: 4,500명 (군인 및 민간인)
노예: 30,000–50,000명의 민간인

2. 동로마 제국의 상황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기 전까지, 동로마 제국은 약 1,100년 동안 여러 차례 침략을 당했지만 완전히 정복된 적은 없었다. 십자군은 처음부터 동로마 제국을 정복할 의도는 아니었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불안정한 라틴 제국이 짧은 기간 동안 세워졌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은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 트라페주스 제국 등 몇 개의 동로마 제국 계열 국가로 분리되었다. 이들은 서로 연합군을 이루어 라틴 제국과 라틴 세력에 대항했으나, 사실상 동로마 제국의 계승을 놓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도


1261년 니케아 제국이 라틴인들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재탈환하면서 분열 이전 동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영토로 삼았다. 그 이후 동로마 제국은 라틴인들과 세르비아인들, 불가리아인들, 그리고 특히 발흥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1321년 이후부터 약 1세기 동안 동로마 제국은 여러 차례 내전과 오스만의 발흥으로 세력이 대폭 약화되어 영토가 계속 축소되었고, 결국 국명만 제국인 도시국가로 변모하는 등 오랫동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453년 당시 제국의 영토는 고작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 자체와 미스트라스 요새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일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흑해 연안에서 살아남은 완전 독립 계승국인 트라페주스 제국뿐이었다. 1346년에서 1349년 사이에는 흑사병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의 거의 절반이 사망했다.

약 1000년에 걸쳐 난공불락을 자랑했던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2세)의 성벽」

3. 개전 전의 상황

오스만 제국술탄 바예지드 1세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에 아나돌루 히사르 요새를 세웠다. 그의 증손자인 술탄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바깥, 유럽 쪽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 요새를 건설했다.[46] 이는 해협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특히 루멜리 히사르는 흑해 연안의 제노바 식민지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으며, 이처럼 해협 양쪽에 요새를 건설한 술탄의 전략적 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통합을 조건으로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1054년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교회 대분열 이후, 로마 가톨릭은 동방과의 재통합을 추구해왔다. 1274년 리옹에서 통합 시도가 있었고, 이후 몇몇 비잔티움 제국 황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받아들였다.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 황제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통합 협상을 시도했고, 1439년 통합선언문 작성을 위한 위원회가 피렌체에서 열렸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통합 반대 여론이 일어나 국론이 분열되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라틴인들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으로 촉발된 그리스인과 이탈리아인 간의 오랜 민족 감정이 통합을 무산시킨 주요 원인이었다. 이에 교황 니콜라오 5세와 로마 가톨릭은 매우 실망했다.

당시 서방의 왕들과 제후들은 각자의 문제로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영국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약해졌고, 이베리아반도의 왕국들은 레콩키스타 막바지에 있었다. 독일의 선제후들은 서로 싸우고 있었고, 헝가리폴란드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했다. 몇몇 북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서방의 원조는 오스만 제국의 전력에 비해 매우 미미했다.

이 전쟁 이전,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표면적으로 평화적인 관계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 모레아 데스포타트(고대 스파르타 근교 미스트라의 요새가 수도)만 남은 상태였다. 로마 제국 분열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러 차례 공격받았지만, 제4차 십자군에 의한 1204년 포위전에서 단 한 번 점령당했다. 10세기 불가리아 제국 군주 시메온 1세나 14세기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처럼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려 한 이들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것을 목표로 삼았다.

개전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 역사가 두카스(Doukas (historian))에 따르면,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세스(재위 1449년-1453년)가 메흐메트를 견제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해 있던 오스만 왕조의 오르한 왕자[36]를 대립 술탄으로 추대하겠다고 경고하자, 메흐메트가 분노하여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 1452년부터 1453년은 세계적인 이상 기후가 발생한 “여름 없는 해” 중 하나였다. 해저 화산 쿠와에가 여러 차례 폭발하여 발생한 대량의 화산재 영향(화산의 겨울)으로 수년간 냉여름이 계속되어 대기근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양측의 전력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황


동로마 제국 군사는 대략 7,000명이었으며, 그 중 2,000명은 용병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포위가 시작될 때 난민을 포함해 약 5만 명 정도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 도르가노가 이끄는 튀르키예인 부대는 바다쪽 성벽을 지켰으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순간까지도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다하며 함께 싸웠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약 20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육지에 면한 5.5km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금각만과 면한 7km의 해안 성벽, 마르마라해와 면한 7.5km의 해안 성벽은 역사상 최고로 굳건한 성벽으로 평가받았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 제국군은 예니체리 군단 10,000~20,000명을 포함하여 전체 80,000~200,000명 정도로 추정되나, 정확한 병력 규모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출신(다른 기록에는 독일인 또는 스웨덴인) 기술자 우르반을 고용하여 대포를 제작했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무기였던 대포는 포길이가 8m가 넘고 직경은 75cm가량이었으며, 544kg의 포탄을 거의 1.6km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이는 공성용 "대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동로마 제국도 대포를 보유했지만, 규모가 훨씬 작았고 반동으로 인해 오히려 성벽이 파손되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 당시 방어군과 공격군의 배치도

4. 1. 동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은 약 1,100년 동안 존속하면서 여러 차례 침략을 당했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정복된 적이 없었다. 십자군은 처음부터 동로마 제국을 정복할 의도는 아니었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불안정한 라틴 제국이 잠시 세워졌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은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 트라페주스 제국 등 여러 계승 국가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라틴 제국에 대항했지만, 사실상 동로마 제국의 계승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은 라틴인들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라틴인들, 세르비아인들, 불가리아인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1321년 이후 약 1세기 동안 동로마 제국은 여러 차례 내전과 오스만의 발흥으로 영토가 계속 축소되어 결국 도시국가로 전락하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1453년 당시 제국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 자체와 미스트라스 요새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일부, 그리고 트라페주스 제국뿐이었다.

동로마 제국 군사는 대략 7,000명이었으며, 그 중 2,000명은 용병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포위가 시작될 때 난민을 포함해 약 5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 도르가노가 이끄는 튀르키예인 부대도 바다쪽 성벽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순간까지도 함께 싸웠다.

도시는 대략 20km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육지에 면한 5.5km 테오도시우스 성벽, 금각만과 면한 7km 해안 성벽, 마르마라해와 면한 7.5km 성벽으로 당시 역사상 최고로 굳건한 성벽이었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쪽 병력은 다소 의견차이가 있는데 대략 예니체리군단 10,000~20,000명을 포함 전체 80,000~200,000명 정도로 보인다. 오스만은 헝가리 출신(다른 기록에는 독일인 또는 스웨덴인)의 우르반이라는 기술자를 고용했는데 그는 대포 제작 전문가였다. 당시로선 대포는 비교적 신무기에 속했다. 그는 거대한 대포를 제작했는데 포길이가 8m 가 넘고 직경은 75cm가량, 544kg 포탄을 거의 1.6km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비잔티움쪽도 대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규모가 훨씬 작고 반동으로 인해 오히려 성벽에 파손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 전쟁 이전에는,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표면적으로는 평화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 시대가 되면 “제국”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 모레아 데스포타트(고대 스파르타 근교에 있는 미스트라의 요새가 수도)만을 남기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지만, 점령된 것은 제4차 십자군에 의한 한 번(1204년의 포위전)뿐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함대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황금각 만 입구에 설치한 방어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요한 상업 거점으로 삼았던 베네치아제노바는 원군을 보냈고, 동로마군은 2000명의 외국인 용병을 포함해 7000명이 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측은 술탄 직속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군단 2만 명을 중심으로 10만 명의 대군에다, 해상 포위를 위해 함선을 건조했다. 또한 헝가리 기술자 우르반이 판매한 신형 무기 우르반 대포를 채용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것은 길이 8m 이상, 지름 약 75cm의 거대한 것이었는데, 544kg의 돌포탄을 1.6km까지 날릴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에도 대포가 있었지만, 더 작은 것이었고, 사격의 반동으로 성벽이 손상되는 경우도 있었다.

4. 2.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군의 병력 규모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예니체리 군단 10,000~20,000명을 포함하여 총 80,000~20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 방어 측 기록은 과장된 경향이 있어 정확한 병력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1464년 무니르 알리(Munir Ali)가 주조한 다르다넬스포 대포(Dardanelles Gun)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당시 오스만군이 사용한 대포와 유사하다 (영국 왕립무기고(Royal Armouries) 소장).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또는 독일, 스웨덴) 출신 기술자 우르반을 고용하여 대포를 제작했다. 우르반이 제작한 거대한 대포는 포신 길이 8m, 직경 75cm에 달했으며, 544kg의 포탄을 1.6km까지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이는 공성용 대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사례로 평가된다. 동로마 제국도 대포를 보유했지만, 규모가 작고 반동으로 성벽이 파손되기도 했다.

메흐메트 2세는 145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세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되었다. 유럽 궁정들은 젊은 메흐메트 2세가 발칸 반도와 에게 해에서 기독교 세력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북쪽 보스포루스 해협에 루멜리히사르 요새를 건설하며 본격적인 정복 준비에 나섰다. 루멜리히사르는 증조부 바예지드 1세가 건설한 아나돌루히사르 요새와 마주보며 해협을 통제하고, 흑해 연안 제노바 식민지의 공격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1452년 10월, 메흐메트 2세는 투라한 베그에게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규모 주둔군을 배치하여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들인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와 데메트리오스 팔라이올로고스가 지원군을 보내는 것을 막았다. 또한, 카라차 파샤는 에디르네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도로를 정비하고, 다리가 대포를 견딜 수 있도록 보강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파우스트 쪼나로(Fausto Zonaro)가 그린 메흐메드와 거대한 대포를 앞세운 오스만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는 모습을 묘사한 근대 회화.


메흐메트 2세는 갈리폴리 출신 스페인 선원들을 포함한 함대를 건조하여 해상에서 도시를 포위했다. 당시 오스만 함대 규모는 자료에 따라 110척에서 430척까지 다양하게 추정되지만,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대형 갤리선 70척, 일반 갤리선 5척, 소형 갤리선 10척, 대형 노선 25척, 마상 수송선 75척 등 총 110척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전부터 중형 대포를 주조할 수 있었지만, 실전에 배치된 대포들의 사거리는 방어 측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오스만군은 12문에서 62문에 이르는 대포를 배치했으며, 이 대포들은 대부분 사루카 등 터키 기술자들의 주조소에서 제작되었다. 우르반도 최소 한 문의 대포 제작에 참여했다.

우르반의 8m 길이 대포는 "바실리카"라고 불렸으며, 272kg의 돌 포탄을 1.6km 이상 발사할 수 있었다. 우르반은 처음에 비잔티움 제국에 기술을 팔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메흐메트 2세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무기가 "바빌론의 성벽조차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메흐메드 2세는 우르반에게 풍부한 자금과 자재를 제공했고, 우르반은 에디르네에서 3개월 만에 대포를 제작했다. 그러나 이 대포는 재장전에 3시간이 걸리고, 포탄이 부족하며, 6주 후에는 반동으로 파손되었다는 단점이 있었다. 대포 파손에 대한 기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메흐메드는 약 240km 떨어진 곳에 대규모 주조소를 설립하고, 70문의 대형 대포를 포함한 포병 부대를 에디르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시켰다. 여기에는 우르반의 거대한 대포도 포함되었는데, 60마리의 소와 400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터키 기술자 사루카가 제작한 또 다른 대형 대포도 전투에 사용되었다.

메흐메드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1453년 4월 2일 부활절 다음 월요일에 도시 외곽에 진을 쳤다. 오스만 군대의 대부분은 황금각 남쪽에 배치되었고, 정규 유럽군은 카라자 파샤가 지휘했다. 이샤크 파샤가 이끄는 아나톨리아 출신 정규군은 리쿠스 강 남쪽에서 마르마라 해까지 주둔했다. 메흐메드 자신은 메소테이키온 근처에 붉고 금빛 천막을 설치하고, 예니체리 연대를 배치했다. 자간 파샤가 이끄는 병력은 황금각 북쪽에 배치되었고, 황금각 습지대에 파괴된 도로를 통해 통신이 유지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도시 포위에 능숙했으며, 질병 예방을 위해 시체를 소각하고 배설물을 위생적으로 처리하며 수원 관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5. 공성전과 총공격

술탄 메메드 2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성벽은 복잡하고 두터운 성벽과 해자로 이루어져 있었고, 도시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1453년 4월 2일, 부활절 다음 날, 오스만 제국군은 도시 외곽에 진을 쳤다. 메메드 2세는 240km나 떨어진 주조 공장에서 만든 대포들을 가져왔는데, 가장 큰 대포는 90마리의 소와 400명의 병사가 끌어야 했다. 이 대포를 만든 우르반은 원래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 측에 기술을 제안했지만, 형편없는 조건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기술을 넘겼다고 한다. 메메드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우르반의 대포는 강력해졌지만, 조준이 부정확하고 재충전에 시간이 오래 걸려 그 사이에 방어 측이 성벽을 보강했다.

동로마 제국 측은 황금각 만 입구에 쇠사슬을 설치하여 오스만 함대의 진입을 막았다. 메메드는 이를 우회하여 금각만 북쪽에 기름칠한 통나무를 늘어놓고 함대를 굴려서 금각만으로 들여보내는 작전을 펼쳤다. 이로써 제노바의 공급선을 저지하고 동로마 방어 측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오스만 제국군은 성벽 아래로 터널을 파는 시도를 했으나, 동로마 방어 측은 요하네스 그란트라는 기술자를 고용하여 역으로 터널을 파고 들어가 오스만 군을 격퇴했다. 5월 23일에는 두 명의 오스만 장교를 고문하여 모든 터널의 위치를 알아내고 격퇴하였다.

5월 24일, 월식이 일어나 동로마에서는 도시가 패망할 흉조라고 여겼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첫 황제와 같은 이름의 황제 치세에 멸망한다는 전설도 퍼져 있었다. 당시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로, 동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이름이 같았고, 어머니의 이름도 헬레나였다. 며칠간 뇌우와 안개가 자욱하여 방어 측의 사기가 떨어졌다.

5월 29일 술탄의 총공격이 시작되기 전, 여러 불길한 징조로 인해 방어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5. 1. 오스만 함대의 육상 이동

메흐메트 2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성벽은 복잡하고 두터운 성벽과 해자로 이루어져 있었고, 도시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1453년 4월 2일, 부활절 다음 날, 오스만 제국군은 도시 외곽에 진을 쳤다. 메메드 2세는 240km나 떨어진 주조 공장에서 만든 대포들을 가져왔는데, 가장 큰 대포는 90마리의 소와 400명의 병사가 끌어야 했다. 이 대포를 만든 우르반은 원래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 측에 기술을 제안했지만, 형편없는 조건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기술을 넘겼다고 한다.

몇 주 동안의 포격에도 성벽은 뚫리지 않았다. 대포의 조준이 부정확했고 재충전에 시간이 오래 걸려 그 사이에 방어 측이 성벽을 보강했기 때문이다. 한편, 메메드의 함선은 동로마 제국이 황금각 만 입구를 봉쇄하여 들어갈 수 없었다. 메메드는 이를 우회하여 금각만 북쪽에 기름칠한 통나무를 늘어놓고 함대를 굴려서 금각만으로 들여보냈다. 이 작전은 "오스만 함대의 육상 이동"으로 불리며, 제노바의 공급선을 저지하고 동로마 방어 측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파우스토 조나로(Fausto Zonaro)의 그림.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함대를 육로로 황금뿔(Golden Horn)로 이동시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5. 2. 최후의 공격

5월 29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공격은 5만여 명의 비정규군 보조병 부대였다. 이들은 무장과 전투력이 형편없었지만, 숫자로 밀고 들어와 동로마 방어병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 비정규군이 퇴각한 후, 오스만 제국의 정규군인 아나톨리아 군단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도시 북서쪽의 약한 성벽에 집중된 이 공격으로 점차 도시의 방어선이 무너져갔다. 방어측에게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제3차 파상공격으로 술탄의 정예부대이자 가장 강력한 부대인 예니체리 군단의 공세가 이어졌다. 이때 제노바의 용병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롱고 장군이 심각한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실려갔다. 이에 제노바 용병들의 전열이 무너졌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예니체리들이 물밀듯이 외성벽을 치고 들어와 결국 성벽 탑에 오스만 제국의 깃발을 꽂는 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방어측의 전선은 급격히 무너져 내려 도시로 앞다투어 퇴각하고, 오스만 제국군은 성문을 열고 밀려들어왔다.[37]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황제의 상징인 자줏빛 망토를 벗어던지고 병사들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군과의 혼전에 합류하여 싸웠으나, 그 후 그의 모습을 다시 본 사람은 없었다. 제국과 운명을 함께한 이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6.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의미했으며, 이후 여러 사건들이 발생했다.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했다. 정교회에 대해서는 억압 정책을 펼치면서도, 게나디오스 2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하여 정교도를 회유하려 했다.

함락 이후, 모레아 데스포타국은 1460년까지 존속했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는 로마로 망명하여 교황과 제후들에게 동로마 제국의 망명 황제로 대우받았고, 데메트리오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술탄에게 투옥되었다. 1461년에는 트라페준타 제국이 메메드 2세에게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후사 없이 사망했고, 그의 조카들은 메메드 2세의 궁궐에서 자랐다. 이들은 각각 무라드와 메시 파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서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고, 기독교 세계는 동쪽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십자군을 통한 재정복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많은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피난하여 르네상스 발전에 기여했다.

이슬람 세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크게 기뻐하며 축하했다. 메카의 샤리프는 메메드 2세를 "이슬람과 무슬림들을 도운 자"라고 칭송했다.

6. 1. 학살 및 약탈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메메드 2세는 카리시오스 문(에디르네 문)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방어선이 무너지자 투르크 군대는 도시로 퍼져 나갔다. 메메드 2세는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중요한 건물에는 호위병을 보내 파괴를 막았다. 그는 이 도시를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다.

투르크 병사들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앞 황제의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대성당 청동문 뒤에는 수많은 도시 주민이 몰려들어 수호성인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고 피신해 있었다. 공격군에게는 전통적으로 3일간의 약탈이 허락되었으나, 술탄은 약탈이 파괴적이어서 하루 만에 약탈을 거두었다.[15] 투르크 병사들은 반항하는 사람은 죽이고 저항하지 않은 자들은 노예로 삼았다. 당시 도시 인구는 약 4만 명 정도였는데, 살해당한 사람은 약 4,000명가량이었다.[16] 술탄은 이 도시를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고 하기아 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6월 2일, 술탄은 도시가 대부분 버려지고 반쯤 폐허가 된 것을 발견했다. 교회들은 더럽혀지고 약탈당했고, 집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었으며, 상점들은 비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약탈과 파괴에 넘겨준 도시라니!"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데이비드 니콜에 따르면, 일반 시민들은 1204년 십자군에 의해 조상들이 받았던 대우보다 오스만 정복자들로부터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는 포위 공격 중 약 4,000명의 그리스인만이 사망했다고 말했으며, 베네치아 상원 보고서에 따르면 50명의 베네치아 귀족과 500명이 넘는 베네치아 민간인이 포위 공격 중 사망했다고 한다.

키오스의 레오나르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의 잔혹 행위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오스만 침략자들이 도시를 약탈하고 수만 명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삼았으며, 수녀들과 여성들, 어린이들을 강간했다고 한다. 그는 "모든 귀중품과 다른 전리품은 그들의 진영으로 가져가졌고, 6만 명이나 되는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교회 지붕이나 벽에 놓였던 십자가들은 찢겨 내려져 짓밟혔다. 여성들은 강간당했고, 처녀들은 더럽혀졌으며, 청년들은 수치스러운 추태에 참여하도록 강요당했다. 남겨진 수녀들, 심지어 분명 수녀인 사람들조차도 더러운 방탕으로 수치를 당했다."라고 기록했다.

오스만 관리 투르순 베그는 "적을 완전히 제압한 후, 병사들은 도시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년과 소녀들을 노예로 삼고, 황궁과 부자들의 집에서 은과 금 그릇, 보석, 온갖 귀중품과 직물을 가져갔다… 모든 천막은 잘생긴 소년들과 아름다운 소녀들로 가득 차 있었다."라고 썼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이 저항하려고 하면 살해당했다. 니콜로 바르바로에 따르면, "하루 종일 터키인들은 도시 전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대량 학살했다"고 한다. 마카리오스 멜리세노스는 "터키인들이 도시 안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길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을 붙잡아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저항하려는 모든 사람들은 칼에 찔려 죽었다. 많은 곳에서 시체 더미로 인해 땅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성들은 오스만 군대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 역사가 필립 맨셀에 따르면, 도시 시민들에 대한 광범위한 박해가 발생하여 수천 명이 살해되고 강간당했다.[17]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의 대다수(30,000~50,000명)는 노예가 되었다.[17][4][18][3][19] 오스만 연대기 작가들은 "그들은 도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황제를 죽였고, 가즈들은 그들의 예쁜 소녀들을 품에 안았다."고 확인한다.[20]

니콜라 드 니콜라이에 따르면, 노예들은 도시의 노예 시장에서 알몸으로 전시되었고, 어린 소녀들은 살 수 있었다.[21] 아이아 소피아에 있던 나이든 난민들은 살해당했고 여성들은 강간당했다.[22] 조지 스프란체스는 남녀 모두가 아이아 소피아 내부에서 강간당했다고 말한다. 스티븐 런시먼에 따르면, 교회 안에 있던 대부분의 노인과 허약하거나 부상당하거나 병든 사람들은 살해되었고, 나머지는 사슬에 묶여 노예로 팔렸다.

메흐메트가 도시에 들어섰을 때 "어디에나 불행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고통에 닿았다". "모든 집에는 애가 있었고, 갈림길에는 비명이 있었고, 모든 교회에는 슬픔이 있었다. 어른들의 신음소리와 여자들의 비명이 약탈, 노예화, 이별, 강간과 함께했다."[23]

정복 3일째, 메흐메트 2세는 모든 약탈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포로가 되지 않았거나 몸값을 지불한 모든 기독교인은 추가적인 피해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선포를 발표했다.[28]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돌아갈 집이 없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몸값을 지불하지 못했다.

7. 평가 및 영향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중세를 마감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자, 근세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리스-로마 문화를 간직해온 많은 학자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이들이 가져온 지식과 고문서들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45]

피우스 2세는 오스만 제국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을 박해할 것이라고 믿었고, 1459년 만토바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주장했다.[35]

발칸 반도 국가들은 동로마 제국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거나 합스부르크 가에 지배되었다. 이들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독립을 회복했다.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에 대해서는 모레아 공국, 트라페주스 제국 문서를 참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단순히 한 제국의 멸망을 넘어, 세계사가 중세에서 근세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45][43]

7. 1. 르네상스에 미친 영향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천년 넘게 그리스-로마 문화를 간직해온 이 도시를 떠나 서유럽으로 망명한 많은 로마인들이 가져온 지식과 문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 제국 학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의 일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이슬람에 의해 연구된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이 서유럽으로 대거 유입된 것은 분명하다.[45]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중세를 마감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자, 근세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1537년 루마니아 몰도비차 수도원 벽화에 그려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파우스토 조나로의 그림,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는 모습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전후, 많은 그리스인 학자들이 동로마에서 보존·연구되어 온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헌을 가지고 서유럽으로 망명하였고, 이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45]

7. 2. 종교 개혁에 미친 영향

기독교도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요한 성지였기에,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의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45]

7. 3. 대항해시대에 미친 영향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가 함락되고 이후 통행에 제약이 가해지자,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치지 않는 새로운 항로 개척이라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었다.[43][44]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했던 제노바, 베네치아 등의 도시 국가들은 그들의 이권을 오스만 제국에 빼앗기고 이탈리아의 한 지역 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들 국가의 선원들은 대부분 이후 스페인포르투갈 등 이베리아 반도의 신흥 국가로 이주하여 대항해시대에 큰 활약을 하였다.

7. 4. 제3의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전후, 러시아 제국독일 제국 등은 제2의 로마였던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제3의 로마를 표방했다.[45] 이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 유럽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8. 관련 유적 및 문화

오스만 제국의 국가인 튀르키예 정부는 2020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567주년 기념식을 아야 소피아[41]에서 거행했다. 그리스 정부는 이곳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낭독한 것에 대해 "전 세계 기독교인에 대한 모욕"이라며 항의했다.[40]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0년 7월 10일, 세계유산 이스탄불 역사 지구를 대표하는 옛 대성당 아야 소피아를 다시 이슬람교모스크(예배소)로 사용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42]

8. 1. 튀르키예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인 국가인 튀르키예 정부는 2020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567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그리스 정부는 행사 장소인 아야 소피아[41]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낭독한 것에 대해 "전 세계 기독교인에 대한 모욕"이라며 항의했다.[40]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0년 7월 10일, 세계유산 이스탄불 역사 지구를 대표하는 옛 대성당 아야 소피아를 다시 이슬람교모스크(예배소)로 사용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42]

8. 2. 그리스


  • 두카스, 비잔티움 그리스 역사가.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 직전 수십 년과 궁극적인 오스만 제국에 의한 함락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 라오니코스 칼코콘딜레스, 비잔티움 그리스 역사가.
  • 미카엘 크리토부로스, 비잔티움 그리스 역사가.
  • 마카리오스 멜리수르고스, 16세기 역사가. 스프란체스의 기록을 보강했으나 신뢰성이 높지 않다.
  • 요한 모스코스, 루카스 노타라스를 기리는 시를 썼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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